in

월간 윤원보 vol.13 "난 모르겠어"(2부)

you need more fantasy, 2021, oil on canvas, 117 x 91cm

 

4.

내가 하는 일은 미술관 로비에 만들어진 라이브러리의 자료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면서 체계인 아카이브를 만들어가는 거였는데, 비유하자면 천둥벌거숭이를 사럼처럼 보이게 만드는 일이었다. 일이야 많을 거라는 것을 알았지만, 많았다. 어느날 라이브러리에서 일을 처리하고 사무실 내자리에 와서 잠깐 쉬고 있는데 눈앞에 살풍경이 벌어졌다. 직원들이 서로 부둥켜 안고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이번에 계약이 끝나는 시점인데 재연장이 되었다는 소리에 기쁨의 포옹을 나누고 있다고 했다. 소위 스펙이 좋다는 사람들이 계약직 연장이라는 소식에 저정도로 감격해 하는 것을 보고있자니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겉으로만 보면 똑똑하고 남부러울것 없는 사람의 표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 속으로는 저리도 절박할 줄이야. 그런 절박함을 그들의 마음속에 넣어놓은 이는 누구일까. 어디서나 지켜보는 ‘스토커 자본주의’는 우리의 멱살을 잡고 쉴새없이 협박한다. ‘니가 내 손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문득, 내 멱살을 쥐고 있는 ‘스토커’의 만행에 반감이 들었고 며칠 후부터 나는 이직을 알아보고 있었다. 이직을 하려는 이유는 과중한 업무와 계약직이라는 신상의 문제 뿐만이 아니었다. 더 큰 이유는 직속상관의 태도였다. 상관은 중년의 여성이었는데 캐나다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건너온 후 사회생활은 미술관이 처음이라고 들었다. 교양있는 말투를 쓰고 있기는 하나 마음기저에는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가 깔려있었다. 재수는 없으나 상관이기에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점점 도가 지나쳐 갔다. 알고보니 나보다 앞서 4명의 직원들이 상관의 태도에 기가 질려 그만두었다고 했다. 또다시 불난 집의 당사자가 되어보니 이번에는 ‘호떡이나 부쳐볼까’하는 생각이 들만큼 역시나 뜨거웠다.

해서 나는 탈출을 계획하고 있었고 아무도 모르게 심지어 나조차도 모르게(응?) 이직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어느날 라이브러리에서 여느 때처럼 일을 하고 있는데 상관이 접시에 과일을 담아가지고 내려왔다.

– “원보씨, 얘기 좀 합시다”

– “네”

– “내가 최악의 보스인가요?!”

– “아, 네”

누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착하게 생겨서 할말 다하네’. 틀린 말은 아니지.

 

나에게 저렇게 물어보는 그 심플함에 점수를 준다곤 쳐도, ‘보스’라는 단어로 스스로를 지칭하며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나의 직장 ‘보스’가 아니라 자기 객관화를 잃어버린 꼴사나운 한 명의 어린애를 보는 듯했다. 그래서 감점.

 

사람은 대부분 자신을 과소평가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우물 안을 보면서 보이지도 않는 나를 찾는 것과도 같다. 캄캄한데 무엇이 보일리 있겠는가. 보이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적다. 과소평가는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의 또다른 수단이다. 히어로 영화의 주인공들은 절대 우물 안을 들여다보지 않는 극단적인 자기 과대평가의 전형이다. 돈, 큰집, 빠른차, 두둑하다 못해 숫자 잉크가 통장 밖으로 튕겨져 나올 것만 같은 통장잔고의 숫자들. 그것도 부족해 초능력까지 가진 그들은 언제나 낙천적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열광한다. 나와는 다르지만 남몰래 마음껏 감정이입해볼 수 있도록 엔터테인먼트는 낙천적인 과대평가를 제공한다. 영화가 끝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남루한 과소평가이지만, 그것은 허황된 과대평가의 반대편에서 자기객관화를 가능케 할 수 있는 지렛대 역할을 한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전공의 유무에 상관없이 그림을 잘 그리고 못그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스펙이 좋아도 그림이 별로인 작가들을 볼 때면 자기 그림에 대한 객관화가 부족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는 것은, 라이센스의 유무로 판단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그림이 좋은 그림인지, 어떻게 하면 좋은 그림이 될 수있는지 분별 할 수 있는 자기객관화를 가능케하는 태도인 것이다. 사람이든 그림이든 자기객관화를 잃어버리면 누추해진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면 붓을 놀리는 시간만큼이나 그림을 바라보며 관찰하는 시간이 많다. 작업 중인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서 틈날 때마다 보고, 집에서는 캔버스를 거실 가운데에 세워 놓고, 책 읽다가 보고 밥먹으면서 보고 빨래 개면서도 본다. 그렇게 오래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비로소 이 그림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이 좋은지 슬슬 눈에 보이면서 비로소 객관적인 판단이 서기 때문이다. 오해없기를. 내가 말하는 객관화는 객관식이 아니다. 자기만의 주관적인 객관화이다. 즉, 자기에게 어떤 옷이 어울리는지 잘 아는 것 말이다. 김어준씨가 이런 얘기를 한적이 있다. “나는 편협하다. 그러나 그것에 이르는 과정은 대단히 합리적이다”. 나는 이 말이 자기객관화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과소평가조차 너에게 과대평가라는 것을 모르냐, 라는 말이 어디선가 들린다. 아니, 안들린다, 안들려)

 

5.

몇 달 후 나는 이직을 했다. 여기서도 일은 많고, 마음 맞지 않는 사람들은 있었다. 그것이 사회 생활이라고 다들 믿으며 어쩔수 없다는 듯이 살아가지만, 왜들 그렇게 서로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난 식인종처럼 구는 걸까. 문명사회와 원시사회와는 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 레비스트로의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라도 읽은 걸까. 과연 우리는 식인종 보다 나은 ‘자기객관적인 문명인’일까.

회사 밖에 앉아 나무에서 사과가 뚝하고 떨어지는 걸 보고 있자니 문득, 우주를 관장하는 만유인력의 법칙에 버금가는, 박돌아 박사님(63세, 돌아뇌과학인지연구소)이 발견한 ‘ 또라이의 법칙’이 떠올랐고,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을 헤아리다가 ‘과연 또라이는 내가 아니었을까’하는 자기객관적인 생각이 들었는데,

…에이, 설마.

Credit 글작가, 화가 원보 | 월간 윤원보
Web Editor PICTORIUM

What do you think?

15 points
Upvote Downvote

Comments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Loading…

0

(전시) 만욱 개인전 “개걔계-세 개의 세계”

(전시공모) 픽토리움 작가전 Flower p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