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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윤원보 vol.14 "이화"(1부)

웃으면서 돌아와, 내게 2014, acrylic on canvas, 100 x 80.5cm

1.

당시 우리집은 41.2도 각도가 좀 더 넘는 경사진 언덕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나뭇잎의 줄기처럼 여러 갈래로 흩어지는 골목의 품안에 자리한 우리집은 따뜻한 나의 유년기를 간직한 세상에서 가장 좋은 장소였다. 3층 집의 옥상에는 창고로 쓰인 옥탑방이 있었는데 나는 자주 그곳을 기웃거렸고, 그곳에서 혼자 놀곤 했다.

어느 날, 옥상에 올라 밑을 내려다보면서 생각했다.

– ‘여기서 뛰어내리면 어떻게 될까’

2.

한 남자가 논둑을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논둑의 양옆으로는 수많은 백골들이 그의 등장을 환영이라도 하듯이 줄지어 쌓여있다. 카고바지에 검정색 혹은 흰색(어쩜 회색일지도)의 나시를 입은 그 남자의 오른손에는 M-60기관총이 들려 있는데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총신에서는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다. 졸린 듯한 눈, 왼쪽보다는 오른쪽 입꼬리가 인상적으로 처져있어 금방이라도 ‘애드리안’이라고 외칠 것만 같은 입술, 근육질에 파마머리를 한 그는, 혼자서 적진으로 뛰어들어 모조리 쓸어버리고는 관객들의 갈채를 받으며 퇴장 중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그의 이름은 람보였다.

이것이 내가 극장에서 본 영화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다. 귀여운 어린이의 기억에 백골들이 즐비한 영화에 대한 기억을 심어준 아버지를 ‘이봐요, 아저씨’라고 불러버릴까도 했지만, 아버지를 탓하진 않는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오히려 아들이랑 영화라도 봐야지 하며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잊지 않았음이 한편으로는 기특하기도 했다. <람보>를 선택한 것은 아버지로서는 매우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누나들은 모두 출가외인이 되었고 둘째형, 그러니까 나에게는 둘째 큰아버지는 서울로 일을 다니셨다. 아버지의 첫째형인 큰아버지는, 당시 본인의 취미 생활 외에는 별달리 관심이 없으셨다. 해서 집안의 궂은일을 하거나 농사를 짓는 일은 할머니와 아버지의 몫이었는데, 당시 약관의 나이에 불과했던 아버지는 이런 상황이 화가 나기도 하고 힘들기도 해서 그만, 해병대에 자원입대를 해버렸다. 거기서부터였을까. 아버지가 한국의 람보가 되기로 작정하셨던 것은. 해병대 입대만으로는 람보가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아버지는 해병대에 입대한 것도 모자라 더 나아가서 월남전, 그러니까 반전 운동의 도화선이 되고, 미국 내의 히피즘을 낳은 계기가 된 베트남 전쟁에 자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유야 어떻든 베트남으로 날아간 아버지는 기대했던 람보의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모습으로 전장에서 돌아와야 했는데, 정글을 행군하는 와중에 뒷사람이 지뢰를 밟는 바람에 몸을 다쳐 의가사 제대를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람보는 이국에서 돌아와 이명숙씨를 만나 결혼을 하고 착실하게 회사를 다녔다. 하지만 람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람보덕후’인 아버지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람보칼과 손도끼를 가지고 와서 TV다이 서랍장에 넣어두었다, 람보칼은 등은 톱으로 되어있고 배는 칼로 되어있어 꽤 인상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람보칼을 너무 가지고 싶던 아버지는 회사 동료에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물론 그 회사에는 아버지 말고도 람보는 더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던 람보칼이 나를 향하게 될 줄은.

3.

오래도록 서 있었더니 다리가 저려 왔다. 하지만 지금 포기하면 언제 내 차례가 올지 모르기 때문에 포기라는 단어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나보다 앞선 사람이 빨리 죽기만을 고대하고 고대하고 있었을 뿐이다. 당연히 내 뒤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내가 빨리 죽기만을 바랐을 테지만, 나는 그런 생각이 들수록 더욱 악착같이 오랫동안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현란한 내 손가락에 생사가 달린 ‘켄’은 나의 의지와는 달리 ‘류’의 아도겐을 맞고 끝내 절명해버렸고 10세(발음에 유의하기 바란다)의 나 역시 켄과 운명을 같이 했다. 인간의 희노애락이 점멸하는 이곳, 어린이들에게 인생의 나락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이곳은, <이화오락실>(이하 이화)이다.

당시 내 유년의 전성기(어린이에게 무슨 전성기가 있냐는 말은 하지말기 바란다)를 이곳에서 보냈을 정도로 나는 오락에 빠져 있었다. 호적상의 부모가 람보와 이명숙 여사라면 실질적인 부모는 이화의 사장님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그곳이 ‘좋았다’. 그곳의 열기는 자욱한 담배연기가 가득한 강원랜드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었다. 베팅 금액의 차이는 큰 의미가 없었다. 당시 오락 한 판의 금액인 50원 조차도 내게는 도박꾼의 베팅금액 만큼이나 귀중했으니까 말이다. 100만원을 베팅하는 도박꾼과 50원을 넣고 오락에 임하는 둘의 결연한 자세는 누가 도박꾼이고 누가 오락을 하는 어린이인지 헷갈릴 정도로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는(엄마 맞지?) 이명숙여사 마저도 분간이 힘들 만큼 나는, 진지했다.

일요일 오전 일찍 100원을 가지고 이화를 들어서던 당시의 풍경과 기분은 아직도 생생하다. 문 밖에는 맑은 햇볕이 거리를 가득 채웠고,이화의 쾌적한 차가운 공기가 나를 반겨주었다. 아직 다른 어린이들의 손을 타지 않아 차갑게 식어있는 수많은 오락기들을 보면서 무한한 자유 앞에서 오히려 숨이 막힐 지경인 사람의 벅찬 심경을 나는 느꼈다. 그랜드캐니언은 어디에라도 있는 것이다. 그런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의 폭발은 베수비오화산의 그것과 같았다. 그러니 내 유년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곳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아직까지도 이화는 내게 특별한 장소로 남아있다.

어느 날, 그렇다, 문제가 터지는 날 앞에는 어김없이 어느 날이라는 단어가 쓰인다. 그것은 나 먼저 씻고 올게, 하고는 어김없이 살인마에게 가장 먼저 맞아 죽는 연인들이 등장하는 공포영화의 공식과도 같은 것이다. 나 역시 그 연인들과 별다를 바없이 맞아 죽을 위기가 점점 다가오는 것을 몰랐고, 더욱이 살인마 대신에 이명숙 여사가 주연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언젠가 맞아 죽을 거라는 운명을 어렴풋하게 예상은 했으나, 영화의 주인공이 ‘우리는 이렇게 죽는 건가요?’, ‘그래, 우리는 죽을 거야. 하지만 오늘은 아니지’라며 허세를 부리는 것과 같이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며 지냈던 것 같다. 오늘이 내일이고 내일이 오늘이 되는 것처럼, 마침내 10세 어린이를 발견한 살인마는 한 손에는 람보칼을 들고서 결국 나를 찾아왔다.

 

1부 끝

Credit 글작가, 화가 윤원보 | 월간 윤원보
Web Editor PICTOR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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