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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칼럼] ‘감각의 논리(Logique de la sensation)’

 오감유희 五感柳僖.
 
 그 날을 잊을 수 없다. 시각, 미각, 후각, 촉각 그리고 청각이 하나의 정서로 합치되어 극렬한 쾌감으로 다가왔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 정서는 아련함이었다. 뭔가 어렴풋하고 가물가물하며 그윽하나 실체가 명확하지 않을 때 느끼는 기분이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나를 지배하는 정서가 ‘아련’해서 모든 감각기가 그렇게 된 것인지, 각각의 감각을 통해서 유입된 오감이 공교롭게도 ‘아련’한 정서를 가져서 그런 감흥을 가지게 된 것인지 말이다.
 
 누군가 이 현상 또는 정서를 연구했을 거란 믿음에 서점을 뒤졌다. 대충 찾고자 하는 방향에 어필하는 제목의 책이 보였다.
 ‘감각의 논리 Logique de la sensation’. 철학자 질 들뢰즈가 썼다.
 
 들뢰즈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것이 어떤 ‘힘’의 형태로 되어있다고 말한다. 그 힘은 일종의 리듬인데, 이 리듬을 청각에 보내면 음악이 되고, 시각에 투여하면 회화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의 그림은 고정된 장식이 아니라 살아있는 리듬 감각의 묘사가 된다.
 
 즉 오감 같은 개별 감각은 그 감각기의 특성을 반영한 결과일 뿐이고 한 덩어리로 존재하는, 원천적인 ‘감각의 논리’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자극으로 둘 이상의 감각기를 동원할 수 있는, ‘원천적인 감각’은 ‘공감각의 능력’과 동의어란다.
 
 예를 들어, 시인 랭보는 철자에서 색상을 보았고, 칸딘스키는 그림에서 음악을 들었고 스크라빈은 음에서 색채를 감지했다고 한다. 이는 신체의 감각기와 연결된 오감을 철저하게 분리시켜 인식하는 보편적 상식에서 어긋난다. 즉 (인식론적 측면에서 항상 이성보다 열등하게 취급 받았던) 감각이 존재론적으로 해석되니, 이성과 합리성을 선행하는 ‘어떤 근원적 능력’이 된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지각’은 그 대상과 주체가 다르고 ‘감각’은 대상이 곧 주체이기도 하다. 어렵게 말하자면 -.-, 주체와 대상이란 한 존재가 내재와 초월이란 형용모순을 안고 있는 셈이다.
 
 들뢰즈는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20세기의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을 소환한다.
베이컨의 회화에는 앞 서 말한 ‘힘’이 존재하는데 크게 세 가지 형태다. 그림의 빈 곳을 채우는 배경인 아플라 aplat, 형상을 ‘고립’시키는 트랙, 동그라미, 유리상자 그리고 ‘고립’된 이미지인 형상 이렇게 말이다. 이 각각의 요소들은 자기 고유의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베이컨의 그림을 보면, 항상 아플라와 형상이 강하게 뒤엉켜있다. 그래서 얼굴, 신체의 일부가 일그러지거나 녹아내려 배경에 압착된 것처럼 보인다(일부러 그렇게 그린 것이다). 이를 촉지적이라 표현한다. 다시 말해서 ‘눈’으로 ‘보는’ ‘광학적’ 측면이 아니라 ‘눈’으로 만지는 ‘촉각적’ 측면에 가까운 셈이다.
 
 그런데 눈으로 만지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그런데 앞서 말했지 않은가. 그 힘은 공감각의 능력이 있다고.
 그렇다면 관객은 베이컨의 작품을 눈으로 보더라도 ‘시각적’으로 보면 안되고 ‘촉각적’으로 만져야 제대로 감상하는 것이다(이게 결코 어렵지는 않다. 코로 음악을 듣고 입으로 영화를 감상하라는 것은 냄새에서 리듬을 찾고 식감과 맛으로 그림을 연상하란 의미이기도 하다).
 
 들뢰즈가 이렇게 주장하는 궁극의 배경이 있다. 현대에 이르러 사진기술이 발달하자 회화는 더 이상 재현의 임무에 충실할 이유가 없어지고 사명감도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재현을 따르지 않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몬드리안과 칸딘스키의 작품처럼 눈으로 보이는 실체 말고 ‘뇌’로 지각하고 인식한 ‘추상’을 선보이는 방법 말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주장하는 바가 다르다. 재현 같은 구상과 추상 같은 비구상이 아닌, 제 3의 길을 제시했다. 그것은 추출 혹은 고립을 통해 순수하게 형상적인 것으로 향하는 것으로써 “두뇌를 통과”하지 않고 우리의 “신경 시스템에 직접 작용”한다는 것이다.
 
 결국 오감유희 五感柳僖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인식론 Epistemology과 존재론 Ontology 같은 철학 전반적인 학습과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얼마 전 읽다가 만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나는 뇌가 아니다’가 이해될 듯 하면서 난해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던 것이다.
 
 이성이 아닌 감성도 결국… 공부네.
PS 1. 미학은 말 그대로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원어로는 에스테틱스 aesthetics인데, 그리스어 아이스테시스 aisthesis에서 유래된 단어다. 본디 뜻대로 해석하자면 감각 또는 감성론이 맞는데 미학이 되어 버렸다.
 
PS 2. ‘아는 것이 힘이다’의 프란시스 베이컨은 16세기의 철학자다. 그의 ‘아는 것은 힘이다’라는 말은 ‘신기관’이란 그의 저서에서 언급한 다음의 내용이 축약되어서 인구에 회자가 된 것이다.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지식과 인간의 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인을 모른 채로는 어떤 결과도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을 지배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자연계가 작동하는 데에는 항상 뭔가 원인이 있다. 그것이 법칙이다.”
 
PS 3. 20세기 베이컨이 1969년에 내놓은 삼면화 ‘루시안 프로이트에 대한 세 개의 습작’은 2013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4240만달러에 팔렸다.
그리고 최근의 ‘루시안 프로이트의 초상 연구’ 역시 4333만파운드(약 683억원)에 낙찰되었다. 이는 삼면화가 아닌 한 장짜리 그림이니 몸값(?)이 더 오른 셈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그림 역시 베이컨 작품의 특징인 ‘삼면화’의 일부였다. 일찍이 중앙 패널은 영국의 귀족인 콜린 테넌트에게 팔렸고 측면 각각은 개인 수집가와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림의 주인공 루시안 프로이트(그도 화가였음)는 그와 절친 사이였다가 서로 말도 안하는 사이로 돌변한 라이벌이었다고 한다(말년에 화해를 했을까).

Credit 에디터 Jisoo Kim
            리빙문화 칼럼리스트. 가구와 인테리어를 담은 리빙문화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고찰하고 소개한 <가구, 집을 갖추다 : 리빙인문학, 나만의 작은 문명>의 저자

Web Editor PICTOR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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