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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칼럼] 떠먹여주는 예술

조금 심한 말로 표현하자면, 걸어만 다녀도 떠먹여주는 ‘예술의 일상화’ 시대에 살고 있다.
광교의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이를 경험했다.

 첫 번째는 레고 블록으로 제작된 빈센트 반 고호의 ‘별이 빛나는 밤’이다. 백화점과는 무관하게 레고 매장에서 파는 제품의 하나다. 고전 미술품 특히 회화를 퍼즐, 블록 또는 접이식 그림집 등으로 만들어 파는 것을 많이 봐왔다. 이것도 그 중 하나이긴 하다.
 그리고 이젤 앞에 앉아있는 미니어처 남자(고흐로 추정되는)가 바라보는 밤하늘과 별이 그의 작품에서 선보였던 색상, 조형과 똑같다.
 알다시피 이 작품은 사실적 묘사 보다는 그의 ‘심상에 비친 밤하늘과 별’을 그린 것이기에 실제 밤하늘의 모습은 그림과 같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 팔았다면 어느 누구도 고흐의 작품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한 말을 조금 길게 썼다~.

 두 번째는 건물 8층 계단에 위치한 클로드 모네의 작품 ‘푸르빌의 절벽과 범선’이다.
 초대형 면적을 이루기 위해서 벽면에 붙여진 수많은 타일에 입혀졌다. 그림의 상, 하부와 측면은 기하학적 구조의 천장과 유리창 그리고 그림이 확장된 듯한 바닥 면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런데 모네가 이를 봤을 때 흡족했을까?
 이 그림에는 윤슬이 돋보인다.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그렇게 부른다. 다소곳한 자태를 가진 여성의 이름 같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면 대충 갈긴, 거침없는 붓질이다. 웃긴 일이다. 멀리서 보면 정교하진 않지만 사실적 느낌이 강하게 드니 말이다.
 알라프리마 alla prima기법의 특징이다. 물감을 두껍게 칠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과 같은 프린트물이나 디지털 그림은 알라프리마 재현에 있어서 한계를 가진다. 3D라도 힘들 듯 하다. 입체적 표현이 가능하더라도 그 비정형의 번짐과 맺힘 그리고 엉김을 어찌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을까? 사골로 48시간 우려낸 설렁탕 국물을 MSG가 흉내 낼 수 없음과 같다.

 세 번째는 백남준의 ‘TV물고기’다. 연신 전위적 무용을 하고 있는 한 사내와 유유히 헤엄을 즐기고 있는 물고기가 함께 있다.
 자세히 보면 브라운관 TV의 남자와 어항 속의 실제 물고기는 다른 공간에 있는 것이다. 심지어 무용복 색상으로는 조금 생뚱 맞은 것 같은, 주황색 쫄쫄이도 인상적이다.
 아마도 금붕어 색상과 맞추기 위해서였나? 지금 관점으로는 조금 고루하고 식상할 수 있으나 1975년에는 기이하고 쇼킹할 수도 있다.

 이 남자의 이름을 반추하는 데에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위 예술가 머스 커닝햄.
 기억은 무서운 것이다. 검색해보니 맞았다. 내 기억력이 비상한 탓이 아니라 그를 처음 봤을 때 그 충격이 아직도 남아있음에 이유가 있다.

 무려 38년 전인 1984년 새해 벽두에 전세계 몇 개국에 생중계로 선보였던 지구촌 이벤트가 있었다. 바로 그 위대한 비디오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뉴욕과 파리 그리고 서울에서 생중계했다.
 음…격세지감이다. 컬러 TV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1980년대는 마동석이 “나쁜 놈은 반드시 잡는 거야”라고 외치듯 “TV에서 방영하는 ‘국제적, 세계적 이슈는 무조건 보는 거야” 하던 시절이었다.
 대표적인 생중계 방송으로는 1981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너 비의 ‘세기의 결혼식’, 1985년 라이브에이드 LIVE AID 콘서트, 1984년 KBS의 유리겔러의 초능력쇼 등이 기억난다.
 나열해보니 공교롭게도 1980년대 초중반이 많다. 정말 TV를 통해 우리는 아주 고급진(?) 문화 소비를 했던 셈이다.

 그런데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100억불 수출을 자축한 1977년이 엊그제인 나라에 아방가르드 예술의 생방송이 왠 말이냐 말이다.
문화뉴스의 한 꼭지나 톱뉴스로 한정된 보도가 아닌, 마치 우리나라의 승부가 걸린, 꼭 시청해야만 하는 월드컵 결승전 같았다.
 이유는 극명했다. 자랑스런 한국인 백남준이 주인공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곧 우리국민과 나라의 쾌거였다. 물론 서방의 보도에는 남한에서 태어난 미국인 백남준으로 나왔다.

 해당 방송과 관련한 당시 1984년도 경향신문과 동아일보의 칼럼을 읽었다.
 
 김화영 고대 교수가 쓴 동아일보의 ‘백남준 예술의 충격’ 이란 글의 일부다. “백남준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바로 새로운 현대적 장르의 탄생이 인류에게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장면이다. 이제 우리에게 과제로 주어진 것은 새로운 외래 쟝르의 수용이나 그 주체적 해석이 아니라 창조에의 능동적 참가 뿐이다”.

 그리고 경향신문에는 ‘전위 모른다고 무식인가’라는 제목으로 당시 문화부장이었던 이광훈 기자의 글이 실렸다.

‘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나 커닝험의 전위 무용도 전위라는 딱지가 붙어있는 한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래의 예술일 뿐 오늘의 주류는 아직 아니다. 따라서 시청자들이나 관객들이 이들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들 작품을 완전히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위선’일 뿐이다.”

두  필자의 논점이 다소 대조를 이룬다. 전자는 이른바 국위선양을 한 위대한 탄생을, 후자는 굳이 위선이 될 수도 있는 맹목적 찬양에의 경계를 말했다. 둘 다 일리가 있는데 ‘깐느, 박찬욱 그리고 헤어질 결심’이 생각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하튼 ‘떠먹여주는 예술’을 주는 대로 다 받아먹지는 말자. 체할라.

Credit 에디터 Jisoo Kim
            리빙문화 칼럼리스트. 가구와 인테리어를 담은 리빙문화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고찰하고 소개한 <가구, 집을 갖추다 : 리빙인문학, 나만의 작은 문명>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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