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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윤원보 vol.15 "나와 나와의 틈"(2부)

3. 이방인

언젠가 독일과 영국에 잠시 들렀다. 동양인으로 처음 마주한 유럽의 풍경은 이채로웠다. 쿡스하펜의 동네를 산책하는데 내 눈앞에서 커다란 엉덩이를 움직이며 걸어가는 남성을 보았을 때, 마치 동물원의 코끼리를 보는 듯했다.

어느 날은 해변을 걸었다. 왼쪽에는 낮고 다분히 세련된 주택들이 있었고 오른쪽으로 우주보다 더 넓은 것 같은 대서양이 있었다. 대서양의 옆구리를 걸으며 무심코 바라본 곳에는 누드비치가 보였다. 나무로 만든 펜스가 있긴 했으나 높이가 낮아 누구나 볼 수 있었는데 무엇하나 걸치지 않은 남녀가 해변에 누워있는 모습은 나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았다.

그런 풍경은 주택가의 모습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인상은 나에게 편안함을 주었다. 익명의 존재로 쿡스하펜과 함부르크, 베를린과 런던의 곳곳을 다니면서 나는 한국에서의 나와는 또다른 내가 있음을 확인받았다. 그것은 오래전, 강진의 시골을 걸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이방인의 신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몰랐던 나와 나와의 틈을 발견하는 일인 듯했다.

한국에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나는, 식당에서는 약간 부끄럽기도 하여 점원에게 말을 걸 때 주저하는 일도 있고, 길을 물어보거나, 익숙한 곳에서는 괜히 스스로 눈치가 보여 자유롭지 못했다. 이름을 가진 채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한편으로는 상처받는 일인데, 상처는 이름을 가진 이를 정확히 찾아오기 때문이다. 집과 회사, 혹은 병원이나 패스트푸드의 공간에서 내 이름을 불릴 때 나는 종종 벌거벗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나를 찾지 않았으면 하는데 핀셋으로 꼭 집어 나를 들어 올리는 듯한 기분.

이국에서는 핀셋이 없었고 발가벗지도 않았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는데, 나는 이름이 없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방인은 이름이 없기에 상처를 받는 일도 적다. 그래서일까 한국보다는 오히려 지나가는 혹은 내 옆에 있던 외국인(아, 내국인인가)들에게 말을 걸거나 부탁하기가 수월했다. 낯선 이가 걸어오는 대화에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 동양인이라서 우습게 보는 사람, 그리고 나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의 시선들 틈에서도 이름이 없는 나는 상처받지 않았다. 이방인을 반가워하지 않는 곳에서 상처는 우스워 보였다. 상처는 이름이 없는 나를 찾지 못했다. 이름이 없는 덕분에 그들의 조소와 적대감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거리를 다녔고, 면도도 하지 않았다.

한국에 있을 때는 수염을 정리하지 않으면 지저분해 보여서 아침마다 면도를 했다. 나를 위한 면도라기보다는 사회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행위였다. 함부르크 미술관을 구경하던 중 화장실에 들러 거울을 보니 수염이 거뭇한 내가 보였다. 모든 것이 깔끔해야 했던 혹은 그러려고 노력해야 했던 한국의 거울 속 나보다는 함부르크 미술관 화장실 거울 속의 내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한번은 지인의 독일인 친구에게 보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녀는 정말이냐고 물었고, 나는 진지하다고 답했다. 내가 쓰는 언어와 그들이 쓰는 언어가 달라서 그 단어의 무게를 실감하지 못해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만 사소한 단어의 뉘앙스에서조차 나는 자유로움을 만끽 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화장실에서 면도를 한 일이다. 유럽에서 이름이 없던 –상처도 없던 – 이방인의 신분을 지우고 다시 익숙한 이름을 가슴에 부착한 채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주차장에서 올려다본 하늘에는 어딘가로 떠나는 여객선이 지나가고 그 옆으로는 영국 히드로 공항 대합실에서 본 듯한 새 한 마리가 저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크레바스의 그것처럼 다시 나와 나와의 틈은 깊은 심연만큼이나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4. 핍

비행기에 많이 쓰이는 타이타늄의 산화물인 산화타이타늄으로 만든 티타늄화이트는 은폐력이 좋은 백색안료다. 새하얀 백색보다는 회색과 아이보리가 감도는 화이트를 좋아하지만, 이번만큼은 순결한 백색으로 캔버스를 칠했다. 자 그럼 그림 설명.

커다란 캔버스에 흰색을 전체적으로 발랐다. 물감을 바르기 전에 석회 가루를 물에 곱게 갠다. 반죽이 된 석고 가루가 진득하게 되면 캔버스에 여러번 덧칠을 한다. 마르고 덧칠하는 과정이 끝나면 사포로 캔버스 표면을 곱게 갈아낸다. 캔버스의 구멍들 사이를 고운 석고 가루가 메꿔주면 그림을 절반이나 그린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위에 아무것도 섞지 않은 티타늄화이트를 칠했다.

하얀 캔버스 중앙에서 좀 더 아래에 핍이 웃으며 앉아있고, 탁자 혹은 테이블로 보이는 검은 색 선들은 왠지 모르게 흘러내린다. 핍의 앞쪽에는 파란색 알약 세 개가 보이는데, 아마도 핍이 먹고 남은 약일 것이다. 약을 먹은 핍의 입가에는 웃음이 번지는데, 그 웃음과는 어울리지 않게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 놓고 있다. 그렇다면 핍은 원래 이빨이 뾰족했던 것일까. 그리고 핍의 왼쪽 귀 위에는 난데없이 새 한 마리가 앉아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항상 웃고 있는 핍은 그것이 자신이 아니길 바랐다. 항상 웃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까. 아니 웃고 있는 것 역시 자신의 일부이기는 했으나 그것이 자신의 전부는 아닐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항상 웃고 있는 것은 바보일 뿐이니까. 우연히 테이블 위에 놓인 약을 삼킨 핍은 해변을 보았고 하늘을 보았다. 땅만이 자신이 전부라 여겨졌던 나날들에 웃음이 났다.

한 알을 더 삼켜보니 뾰족한 이빨들이 수없이 솟아나 있었다. 누군가가 너는 여우가 아닌 토끼라고, 그런 보기 흉한 날카로운 이빨은 음흉한 여우에게나 어울린다고 했다. 하지만 핍은 자신의 이빨이 좋았다.

마지막으로 한 알을 더 먹으니 하늘을 나는 새들이 보였다. 빛나는 태양 안에서 자유롭게 낙하하는 새들의 모습에서 핍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고, 확신했다. 가끔씩 새들의 꿈을 꾸었으나 금방 잊혀졌을 뿐 이처럼 오래도록 생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순간 환상인 줄로만 알았던 새 한 마리가 날아와 핍의 귓가에 앉았다. 오래전부터 알던 친구처럼 조용히 서로에게 편안했다. 새 역시 핍을 의식하지 않고 나뭇가지에 앉은 듯이 한참을 머물렀다. 그리고 핍은 오랫동안 새의 모습을 눈에 담아두었다.

더이상 알약은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누군가가 토끼 혹은 핍이라고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이빨은 여전히 뾰족했고, 새들은 핍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아있을 테니까.

Credit 글작가, 화가 윤원보 | 월간 윤원보
Web Editor PICTOR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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