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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윤원보 vol.1 '방심(放心)'

Prozac : happill _ oil on canvas, 2020, 117x9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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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매달 그림을 그리고 글을 씁니다. 이것들을 묶어서 <월간 윤원보>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죠. 어디까지나 재미로 하고 있으나 마음가짐은 꽤 진지한 편입니다. 물론 그림과 글도 부족하나마 ‘영끌’해서 작업하는 것이고요. 해서, 그루그루에서 마련 해준 이 공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열심히 기고할 예정이니, 부디 재미있게 즐겨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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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 그러니까 그림에 관심이 있다고 이야기한 사람들 중 ‘열에 열 한 명’은 모두가 똑같은 말을 했다. “그림 잘 그려서 좋겠다” 그럼 나는 대답한다. “그림을 한 번 배워봐요” “나는 그림에 소질이 없어요. 진짜 못그려요. 사람을 그리면 졸라맨처럼 된다니까. 그래서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보면 부러워요”. 나도 부럽다. 붓을 쥐고는 있지만 내가 그림을 잘 그리는지도 모르겠고 아직도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마음만 급할 때가 하루에 화장실 가는 횟수보다도 많다. 물론 그림을 대하는 그들과 나의 태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무언가를 동경하는 마음은 같기에 그들과 나의 부러움의 성질은 동일하다. 다만 그리기로 하는 ‘내 마음’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냐의 차이인 것이다. 인생의 여러 문제와 마찬가지로, 결국 선택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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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림에 대한 설명부터. 배경은 여러 색의 꽃잎이 겹겹으로 놓여있고 그 위에 핍(토끼)이 웃으면서 누워있다. 오른쪽 팔은 팔베개를 하고 있고 왼쪽 팔은 기지개를 켜듯이 머리 위로 쭉 펴고 있다. 관심을 가지고 그림을 보는 이는 밝은 배경을 보고 이어서 누워있는 핍의 왼손을 보게 될 텐데, 거기에 알약 몇 개가 놓여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보는 이의 시선이 멈춘 이 지점이 그림의 변곡점이다. 작가의 그림을 꾸준히 봐온 사람이라면, 제목이 주는 뉘앙스에 주목할 것이다. 작가는 언제나 제목과 그림에 붙는 글에 신중을 기울이는데, 그림과 텍스트는 상호작용을 일으켜 메시지 전달에 있어서 훨씬 더 극적인 효과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그림에서도 같은 효과를 의도했다. 그래서 붙여진 제목은 ‘프로작Prozac : 해피필(happy pill)’이다. 가장 유명한 우울증 치료제이자 신경안정제로 알려져 있으며 고통을 없애고 행복한 상태로 고양시켜주기 때문에 ‘해피필(happy pill)’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바탕의 컬러풀 한 꽃잎의 배경들과 웃고 있는 얼굴, 개운한 듯 기지개를 켜는 모습에서 핍은 약을 복용한 지 얼마 안 된 ‘해피필’의 상태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밝은 그림이라고 생각되었던 처음의 인상은 즉시 철회되고, 화려한 밝음은 어둠 속으로 물러나며 어두운 현실은 밝은 곳으로 침입한다. 또 한가지 바탕에 검정색으로 칠한 꽃잎이 있는데 보는 이들은 검정색이네? 하고 무심코 넘기겠지만 작가의 의도는 그렇지 않다. 검정색의 꽃잎은 위에 서술한 알약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데,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꽃과 불안, 두려움을 상기시키는 검정을 섞어 놓음으로써 그 의미를 부각시키고자 했다. 일종의 무의식의 표현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명확하다. 이 그림을 통해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불안과 어둠에 대한 인간의 이야기이며, 최종적으로는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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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에서 작가는 자신의 해설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 그림에 대한 유일한 설명은 아니다. 해설은 텍스트(그림 혹은 다른 무엇들)를 바라보는 각자의 주관적인 해석에 참고가 될 객관적인 방법의 하나로서 유용할 뿐이지 절대적인 ‘해석’이 될 순 없다. 왜냐하면 해설과 달리 해석은 개인의 경험과 가치 판단에 따라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많은 보는 이들은 해설을 들으려 할 뿐 본인만의 해석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것에 주저한다. 왜 그럴까. 어쩌면 텍스트와 본인의 경험이 상관없다는 태도, 예술(텍스트)은 어렵다는 인식이 한 몫을 하는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건 <데이비드 호크니>의 국내 전시를 마지막날 보러갔는데 무려 1시간 이상 기다려서야 입장할 수 있었다는 거다. 그것도 마지막 날이었는데! 그림을 해석하는 것을 매우 어려워하면서도 데이비드 호크니나 샤갈과 같은 널리 알려진 화가의 전시에는 왜 그렇게 사람들이 몰리는 걸까. 반면 인사동의 작은 갤러리들을 가보면 전시를 관람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들어가기 머쓱하다. 입장료가 공짜인데도 말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대규모 전시의 경우 수많은 군중들 속에 둘러쌓여 익명성이 보장되면 내가 그림을 이해하고 있다는듯한 제스처를 힘들여 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 군중이 없는 작고 텅 비어있는 갤러리의 경우 보는 이가 들어서자마자 데스크에 있는 직원들의 눈길이 쏟아질 것이고, 조금이라도 그림에 관심이 있는 듯 보이면 갤러리스트가 옆에 붙어서 그림에 대한 의견을 물어볼 ‘우려’가 생긴다. 익명성이 담보되지 못한 나의 존재가 도드라지는 공간에서는 마음 놓고 그림을 감상하기가 어렵다. (옷가게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지 않을까) 그러므로 어디에서든 나의 익명성을 보장해주는 것이 주요하다, 현대는 익명성을 파는 시대인 것이다.

두 번째로는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들은 지금껏 충분히 논의 되어왔고, 그에 따른 해설과 해석이 담긴 책들도 즐비하게 출간되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인상파 화가 본인들보다 인상파에 대해선 지금 사람들이 훨씬 더 잘 알거라 장담한다. 반면 잘 알지 못하는 작가의 텍스트를 보는 경우 할말이 그리 많지 않다. 아무런 사전지식이 담긴 해설도 없기도 하거니와 (비로소 하고싶은 말인데) 내가 텍스트를 해석할 경우 틀릴 수도 있기 때문에 ‘쪽팔림’을 감당할 수가 없다. 맞고 틀리고가 명확한 정답을 강요하는 객관식 시험을 우리의 인생 내내 치르다보면 당연하게도 모든 것에 맞다와 틀리다로 생각이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주류를 이뤄서, 예술에서조차 나의 ‘해석’이 맞을지 틀릴지 걱정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림을 그리는 나 역시도 잘 모르는 작가의 그림을 ‘해석’할 때 주저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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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뇌 깊숙한 곳에는 편도체라는 기관이 있다. 편도체는 외부의 위협에 대한 방어기제로 두려움과 불안 걱정을 관장한다. 위협을 느낄 시에 두려움과 불안을 발동시켜서 위험한 상황에 준비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원시시대에는 순간순간이 위험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맹수들의 공격뿐만이 아니라 독버섯이라든지, 이가 썩었을 때의 어쩌지 못하는 고통 등. 그렇기 때문에 원시시대에는 편도체의 기능은 생명을 부지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반면 지금은 그런 위협이 거의 존재하지 않고 우리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외부 위협에 직면한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거나 치료할 수 있어서 물리적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지만,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위협은 어느 때보다 크다.

내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내 존재를 못견뎌하는 타자들의 시선은 나의 선택이나 의견으로 표명되는 나의 존재를 나의 삶으로부터 유예시킨다. 나의 선택이나 의견이 곧 ‘나’라는 사람의 존재에 대해서 힌트를 주겠지만 ‘나’라는 사람을 전부 설명하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텍스트를 해석함에 있어서 내 해석이 다를 수는 있어도 틀릴 수는 없다. 해석은 오로지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나의 몫이지 당신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텍스트에서 나의 몫을 타자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전개할 수 있다면, 나는 이것을 작은 구원(해피필)이라고 부르고 싶다. 타자의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예술의 정체성 중 하나이기에, 예술이 곧 구원(해피필)이라면,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그림을 잘하든 못하든 그리기로 선택하는 것, 나만의 해석을 가지는 것은 자신으로부터 유예 시켰던 나의 존재를 내 앞으로 불러오는 하나의 작은 상징적인 계기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 인해) 못나 보였던 나 자신과의 솔직한 조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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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장황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모든 것이 다 작가의 주관적인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 이 그림에 대한 해석이 공감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작가의 경험은 다수의 경험과 일치 하지 않으니까. 그러므로 작가 역시, 자신 몫의 이야기를 했을 뿐이니까. 이제는 당신 몫의 이야기를 들려줄 차례이다.

Credit  에디터 윤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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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까지 예술활동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왜 붉은 포도밭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