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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윤원보 vol.2 ‘잘 지내고 있어’ (1부)

i want it alllll, oil on canvas, 91 x 117cm, 2020

1. 밤

많은 것들이 그리운 밤들은 나를 무척이나 곤혹스럽게 하기 때문에, 무엇도 그립지 않은 밤들이 가끔씩 찾아오면 침대에 누워 비로소 알량한 여행들을 떠올려 보곤 한다.

2. 담양

오래전, 훗날을 같이 도모했던 당신과 작별한 이후 나는 여행을 떠났다. 혼자가 되어 떠난 여행에서 무엇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기대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여행지를 고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은 관광지, 혼자라는 어색함이 감춰지기를 바라면서 나는, 사람들 속에 묻혀 달콤한 상처를 핥고 싶었던 것이다.

담양.

아버지의 차를 힘들게 운전해 도착한 그곳은, 내 상황과 감정과 기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비를 퍼붓고 있었다. 난생처음 그렇게 많은 비는 처음이었는데, 문자 그대로 자동차 바퀴의 1/3이 잠겼다. 몸도 마음도 모두 지쳐있었는데 이제는 자동차마저 침수될 상황이었다.

처음으로 혼자 떠난 여행에서 이 지경이라니. 열패감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근처 찜질방으로 들어갔다.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세상을 저주하듯이 쏟아지던 비는 멈추고 햇볕이 쨍쨍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기가 막힌 상황을 보고 있노라니 피식 웃음이 났고, 우주는 내 마음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구나, 라는 생각을 가진 채 찜질방을 나왔다.

여행을 떠나기 전 친구에게서 빌린 DSLR 카메라를 메고 반바지에 샌들을 신고 다녔다. 남자 혼자 여행지에서 그런 차림이라니. 누가 봐도 사진작가인가 싶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름난 명소를 돌아다니면서 무려 일곱 커플들에게서 사진을 찍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카메라에 대해서 쥐뿔도 모르는 나는 사진을 찍어주고는, 망할 커플들에게 ‘사진 잘 나왔네요’라는 선심성 멘트를 하고, 역시 우주는 내 마음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구나, 생각하면서 도망치듯 자리를 뜨기에 바빴다.

여전히 우주가 나를 무시하고 있었지만 배가 고팠다. 유명한 ‘진우네식당’을 찾아서 국수와 삶은 계란을 주문했다. 옆자리를 보니 내가 사진을 찍어준 망할 커플들이 앉아 있었다. ‘저 망할 커플들은 아직 망하지도 않고 국수를 먹으러 왔군. 하긴 망했으면 내 옆자리에 있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괜찮았다. 나는 ’망할커플‘이라고 했지 과거완료형인 ’망한 커플‘이라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그 뜻은, 저 커플들은 앞으로 망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망할‘ 커플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런 생산적인 생각을 하고 있자니 기분이 몹시 좋았다. 웃고 있는 나를 흘끗 보던 ’망하고 있는‘ 커플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모른채 나에게서 등을 돌려 앉았다. 망할 것들.

국수가 나왔다. 듣던 대로 국수는 부드러워서 허기진 마음을 채워주었고 삶은 계란은 비린내 없이 먹기 좋았다. 따뜻한 음식을 먹으니 문득, 나는 잘 지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잊고 싶어 떠나온 여행지에서 여기저기 둘러보며 ‘나무가 크네, 사람들이 많구나, 다음엔 어디를 가볼까, 아 이 음식은 맛있다’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감옥처럼 폐쇄되었던 마음에 소소한 것들이 나를 왕래(往來)하며, 내 안에 조금씩 조금씩 활기를 넣어주었다.

우주는 나를 무시하고 있기는 했으나 잊지는 않고 있었다.

2부에 계속

Credit 에디터 윤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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