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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윤원보 vol.3 '초대하지 않은 기분' (1부)

<초대하지 않은 기분>, oil on canvas, 91 x 72.7cm, 2020

그날 내 하루의 절반은 할머니의 하루가 차지했다. 

1. 네온

늦은 밤, 태양보다 더 밝은 강남을 뒤로 하고 버스에 올랐다. 부담스러운 네온사인 불빛을 뿜어내는 도시는 화려했으나 나는 버스 뒷자리에 앉아서야 비로소 안심했다. 강남은 수많은 이카루스들에게 맡기고, 다시는 방문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그곳을 떠났다.

2. 리어카

한참을 달리던 버스는 익숙한 풍경을 내게 보여주었다. 내가 모르는 곳이 없는 이 도시는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없어도 밝게 빛나는 곳이었다. 음악을 들을 요량으로 이어폰을 꽂고 몸을 좌석에 파묻었다. 기분 좋은 노곤함을 느끼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정돈된 도로, 포근한 슈퍼마켓과 여유로워보이는 사람들 그리고 낡은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깨끗하게 정리가 된 도시에서 할머니의 존재와 리어카는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내가 알던 세계에 불쑥 침입한, 초대하지 않은 이방인처럼. 내가 알던 평온한 동네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나는 무엇인지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할머니의 리어카에는 고봉밥같은 종이박스가 산적했고, 리어카를 끄는 육체는 닳고 닳아 꼬부라져 있었다. 수많은 종이박스를 줍기 위해 이 동네 저 동네 구석구석을 살피며 하루종일 걸었을 할머니의 하루가 짐작되었고 그에 반해 안락함을 구가하던 나의 하루가 미안해졌다. 미안해질수록, 할머니의 모습을 외면하고 싶어졌다.

이른 새벽부터 할머니의 리어카가 울퉁불퉁한 인도와 위험한 도로를 곡예하며 지나갈 때, 나는 느지막히 일어나 별다른 부담 없이 점심을 사 먹었고,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았다. 크게 필요치 않은 물건들을 사며, 집으로 들어가기까지 비밀번호를 세 번이나 입력해야 하는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곤 했다. 그렇지만 힘겹게 보이는 할머니의 삶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하루하루 힘들게 버텨가고 있다고, 오늘 하루 얼마나 힘든 일이 많았는지 필사적으로 떠올리면서 세상이란 그런 것 아니겠냐고, 버스 뒷자리에서 생각했다.

그날 내 하루의 절반은 할머니의 하루가 차지했다. 빨아도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옷에 묻은 얼룩처럼, 남들의 눈에 잘 띄지 않을 만큼 작았지만, 나만은 알고 있어서 그 옷을 입을 때마다 매번 눈에 거슬리는 얼룩과 같은 할머니의 모습. 모든 사람이 내게서 등을 돌려 앉은 것 같은 얼룩과 같은 날들이 있었는데, ‘할머니’의 매일매일은 그런 하루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

3. 사랑의 리퀘스트

집에서 누나와 둘이서 TV채널을 돌리다가 기부 프로그램인 <사랑의 리퀘스트>을 보게 되었다. 늘 그렇듯이 화면 속에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9살짜리 어린아이가 고령의 할머니와 둘이 살면서 밥상을 차리는 장면을 보는 것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나는 누나에게 말했다.

“누나, 저 번호로 전화해서 2,000원 기부 좀 해”

누나는 내게 말했다.

“니가 해”.

둘이 옥신 각신 하는 사이, 9살의 가장은 익숙한 솜씨로 밥상을 다 차리고 누워 계신 할머니의 입에 밥을 떠 넣어드리고 있었다. 고작 몇 미터 앞에 있는 전화기를 들기가 귀찮아서 서로에게 떠밀고 있는 상황이 아이에 대한 모욕처럼 느껴졌다.

나는 수화기를 들고 난생처음 기부라는 것을 했는데, 그달 통화요금내역서를 본 엄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의 암묵적인 동의를 받은 나는 그 후로도 종종 1,000원, 2,000원정도 기부를 하기 시작했다. 전화 한 통으로 나는 그들에 대한 이상한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한동안은 그들을 잊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돈 2,000원에 나는 양심적인 사람이 되었고, 그들과 다른 세계에 속해있다는 우월감을 확인하고 안도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것은 매우 위선적인 행위였다.

Credit 에디터 윤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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