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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윤원보 vol.4 '이럴 때 생각나' (1부)

<이럴 때 생각나 : pm 4>, 캔버스에 유채, 목탄, 117 x 91cm, 2020

‘결심이 태도가 되면 그것이 나를 지켜주리라’ 생각했다.

1.

그날, 나는 어느 곳으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2.

졸았던 것 같다. 책을 보거나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수도 있었겠지만, 하루하루 먼 길을 출퇴근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어서 아마도 나는, 졸았던 것 같다. 

불현듯이라는 말이 꼭 맞게, 불현듯이 눈이 떠졌다. 눈을 떠보니 나는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정신이 돌아오고서야 내가 있는 곳은 지하철이고, 이제 막 도곡역을 지나가고 있었고, 그날 저녁에는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는 것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만, 도저히 알 수 없는 한 가지는, 내가 지금 출근을 하고있는 것인지, 퇴근을 하고있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는 것이다. 밤과 낮을 구별할 수 없는 깊은 지하에서, 당황한 나머지 손목시계를 차고 있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오싹하고 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초등학생때 생면부지의 키 큰 형들이 어깨동무를 하며 따라오라고 했을 때와 비슷한 오금저림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당시 나는 회사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출퇴근하기에 먼 거리, 야근을 밥 먹듯이 해도 어디부터 손을 대야 끝날 것인지 모를 일들, 아무래도 싫은 사람. 뭐 핑계를 대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이런 일들은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나에게 표면적인 명분을 주는 것들에 불과했다. 가끔씩 가는 지방 출장들이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기는 하였으나, 내뱉은 숨은 금방 휘발되어 증발해버리곤 했다. 진짜 문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는 거다. 아무튼. 오금저림이 아직 나를 훏고 있을 때 내 머릿속에서도 한 줄기 뉴런들이 반짝 빛을 내며 속삭였다. 

“그만두자”

3.

그 회사의 입사공고를 보았을 때 나는 자격미달이었다. 미대 전공자에 최소 석사이상. 미술계에서 이름난 회사라 욕심도 났거니와 당시 백수 생활의 곤궁함은 나를 <브레이브 하트>의 멜 깁슨만큼이나 용감하게 만들었고, 어느새 나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의 마지막줄을 쓰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서류전형을 통과하고 2번의 면접 끝에 최종합격을 했다. 나중에 소장님께 물어보니 자기소개서의 한 줄이 인상적이었다고 하셨다. 고속도로에서 입사 통보를 받고 만세를 부르던 일이 있었는데, 지금 나는 지하철에서 내밀하게 퇴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무렵 연봉협상의 시기가 다가왔다. 팀장님과 대리님의 협상이 끝나고 내 차례가 되었다. 소장님께서는 원하는 액수를 물어보셨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결심이 태도가 되면 그것이 나를 지켜주리라’ 생각했고. 나는 말했다. 

“알아서 주세요”

소장님은 예기치 못한 쫄자의 답변에 당황하신 듯 잠시 말이 없으셨고, 이내 알았다고 하셨다. 나는 왜인지 모르게 의기양양해진 채로 소장님실을 나섰다. 팀장님과 대리님이 어떻게 됐냐고 물어봤고, 나는 안에 있었던 일을 얘기해주었다. 팀장님과 대리님은 오오~탄성을 자아내며,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멜 깁슨을 바라보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암묵적인 퇴사의 시그널을 보내고 난 후,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하지만 뒤로 물러설 순 없었고, 진짜 사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나는 소장님께 사표를 제출했다.

(제목인 ‘이럴 때 생각나’는 가수 조규찬님의 동명의 곡을 인용하였습니다.)

Credit 에디터 / 화가, 글작가 윤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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