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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윤원보 vol.5 '바다를 읽는 집' (2부)

<바다를 읽는 집 >, oil on canvas, 117 x 91cm, 2020

물감의 건조상태는 추후에 덧 바를 물감과의 상호작용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적절할 때에 작업을 재개 해야한다.

3. 함부르크

작가님과 작별을 하고 함부르크로 왔다. 숙소에 누워있는데 한국에서도 자주 누워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옷을 주섬주섬 입고 약간의 걱정을 앞세워 함부르크 미술관에 소장되어있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를 보러 나섰다. 미술관의 위치를 숙지하고 나섰지만 선글라스 뒤편에 있는 내 눈알은 안진증 환자처럼 쉴새 없이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새로운 나를 알게 되었는데, 언어지능 따위는 내 좌뇌 우뇌, 심지어 해마조차도 ‘그런게 있을 리가 없잖아’라고, 뭘 귀찮게 그런 걸 물어보냐고 핀잔을 줄만큼,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을 테지만, 용기는 내 몸 어디든, 심지어 손톱 밑이나 발뒤꿈치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서슴없이 독일인 친구들에게 익스큐즈미를 남발하는 나를 보면서 독일이 제2의 고향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익스큐즈미 하나로 쉽게 미술관을 찾았다. 그러나 복잡한 미술관에서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찾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길래 이렇게 꼭꼭 숨겨놓은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몇 명의 직원이 알려주는대로 찾아다녔으나 모두 실패했다. (짜증이라는 말 대신에) 내가 외국인이라고 홀대하는 것 아닌가라는 섭섭함이 너무나도 많아져 그 기분이 내 오장육부를 거쳐 마침내 입을 통해 ‘아오 짜증나’로 나오려던 찰나, 나이 지긋한 할머니께서 이제 막 고향을 등지려는 듯한 나를 손수 인도하시어 그 그림 앞으로 데려다 주었다. 짜증 내지 않기를 잘한 것 같다. 모든 섭섭함을 이겨내고 마침내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를 알현한 나는, 그냥 숙소에 누워서 인터넷 이미지 검색으로 볼 걸 하는 생각이 가득해졌다. 별다른 감흥 없이, 아 이게 그거구나, 정도랄까. 마치 장고 끝에 악수를 둔 이세돌의 심정이었다. 봤으니 됐다, 하고 뒤돌아섰다.

내가 의외로 잘 읽지 않는 분야는 여행서이다. 좋아하는 작가는 있지만 대부분의 여행서는 구미가 당기지 않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저자가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먹었는지 도무지 흥미가 안 생기는 것이고, 두 번째는 여행서에는 의외로 위험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여행글은 최대한 현장성을 보여주려 하지만, 여행사진은 최대한 감성을 전하려 노력한다. 둘의 간극은 내 마음과 너의 마음처럼 멀어서 글과 여행사진은 결국, 또 다른 오리엔탈리즘을 조장한다.

괴리된 글과 사진의 조우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만남처럼 비극적이며, 현장과 환상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는 독자는 정작 현지에서 추방당한다. 먹음직스럽게 찍은 사진, 셔터를 바라보며 천진난만하게 웃는 현지인을 찍은 사진, 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빈티지한 자동차 사진, 이국적인 도시 사진, 은은한 조명에 가려진 저자의 얼굴 사진(혹은 다른 신체부위), 낡은 신발을 찍은 사진, 그 나라의 대중교통을 찍은 사진 등.

무엇보다 같은 페이지에 글과 관련이 없어보이는 사진을 나란히 놓는 계산된 작위적인 편집(뻔함이라는 촌스러움을 면하기 위한)은 – 이를테면, 왼쪽 페이지의 글은 저자가 겪은 시장에서의 에피소드인데 오른쪽 페이지의 사진은 감성을 자극하는 흐릿하게 찍힌 회전목마 사진이다 – 현장(각 나라의 장소)의 이미지를 지워버리고 여행에 대한 감성적인 환상을 조각한다. (여행책에서 느껴지는 저자의 여행담이 부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러한 환상에 기인한 탓이 크다) ‘현장’이라는 명도가 흐릿해지고 ‘감성’이라는 채도가 뚜렸해진 이미지(사진)는 국적에 상관없는 ‘오리엔탈리즘’을 만들어내는데, 이러한 사진들은 현실을 보여주려하는 것에 실패하고 저자의 감성을 최대한 드러내는 시도에 그치고 만다. 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하는데, 왜냐하면 이제 그러한 감성들도 획일적이며 유행처럼 번져갔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감성도 소비되는 시대이다. 무엇인들 소비되지 않을까. 소비되는 것들은 그 자체로 목적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유행하는 글쓰기와 사진 스타일은 그 나라의 현실적인 문제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은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 조금이라도 – 위험의 소지가 있다. 인도에 관한 감상적인 글쓰기는 ‘영적인 나라’ 인도의 카스트제도 해결에 얼마만큼 기여할 수 있을까. 여행의 글쓰기가 인도의 카스트제도나 다른 나라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제시할 의무는 없지만, 현실과 유리된 낭만적인 인식을 심어주는 위험으로부터의 책임까지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해서 역설적이게도 이제는 포토샵을 거치지 않은 날 것의 현장 사진을 담은 여행책이 가장 ‘여행책’답게 읽힐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후지와라 신야는 의도치 않게도 여행기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진정한 ‘여행작가’중 한 명이다. ‘새로운 오리엔탈리즘’의 극복은 이미 후지와라 신야가 오래전에 그 자신의 저서로 보여주었으니, 거기서 ‘새로운’ 독법의 가능성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 모르겠고! 그래서 후지와라 신야의 책을 보라는 거야, 뭐야, 라고 묻는다면, 나는 후칭팡 작가의 <여행자> 를 추천하겠다.

하하.

5. 히드로

돌아오는 길에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노숙을 했다. 그만큼 내게 런던은 인상적이지 않았다. 날씨나 박물관, 대중교통 모두 한국과 별다르지 않았다. 해서 공항에서 노숙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아있다. 공항 구석에 담요를 깔고 누워서 바라본 유리창 밖의 풍경은 쓸쓸했다. 나는 왜 이곳에 왔을까. 잘 살고 싶어서 온 것 같긴 한데, 살다보니 그런 것은 잊어버리는 것 같다. ‘삶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어느 작가님의 문장을 읊조리며 잠이 들었다. 낮에 공항 대합실 안에서 보았던 작은 새 꿈을 꾸었다.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어느새 다가온 아침, 수많은 사람들. 짐을 챙기고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에 올랐다. 프랑크푸르트의 인천행 게이트에 이르러 나는 마음이 놓였다. 다른 게이트를 통해 비즈니스석을 예매한 사람들이 먼저 탑승하고 이코노미석을 예매한 사람은 뒤늦게 쫓아 들어갔다. 나는 지구의 종말이 기정사실화되어 인류의 존속을 위한 소수의 인원만을 선별할 때 이것과 풍경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비즈니스석을 예매한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다. 만족감과 우월감을 감추기 위해 짓는 무덤덤한 표정. 반면 그 표정을 짓지 못해 부러움을 감추는 표정들. 자본주의는 정말이지 중학생때 내 의자에 껌을 붙여 놓은 녀석만큼이나 야비하다.

비행기에 탑승하고나니 내 옆자리에 앉은 여자는 내게 말했다.

“한국 사람이죠?도착하면 저 좀 깨워주실래요?”

“네, 그러죠”

주구장창 잠만 자는 그녀를 위해 식사메뉴부터 음료까지 죄다 챙겨주었다. 미녀는 잠꾸러기니까. 한국에 도착하고 가벼운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그녀를 다시 만난 곳은 짐을 찾는 곳에서였다. 가방을 기다리는데 건너편에서 나를 쳐다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비행기에서 수발을 들어준 그녀였다. 후드티를 입고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가방을 챙겨서 이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아, 물감이 다 말랐다. 다시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물감의 건조상태는 추후에 덧 바를 물감과의 상호작용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적절할 때에 작업을 재개 해야한다.

아까 발라놓은 물감은 삼진도 아니고 홈런도 아니었다. 안타, 그 정도.

인생은 삼진과 홈런 사이, 늘 그 어디쯤에 있기 마련이니까.

Credit editor 글작가, 화가 윤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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