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월간 윤원보 vol.7 리뷰 (1부)

아프리카 africa, 2019, oil on canvas, 73x91cm

기품이 사라진 노동은 즐겁기 힘들다.

1.

‘개가 똥을 끊지’라는 다소 굴욕적인 조롱의 말이 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하는 일이 일인지라, 책 서평을 실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최근의 의료계파업을 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훑어 보았다. 해서 똥을 끊지 못한 나는 이번 11월호에 미뤄왔던 서평 아닌 서평을 실었다.

2.

어제 늦게 잠이 든 탓에 졸린 눈을 비비고 간신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늦게 일어난 탓도 있지만 아침은 거르는 편이다. 아마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아침을 대충 때우거나 먹지 못할 거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식사를 거르면서까지 이래야 되나라는 생각은 바쁜 아침 출근길에는 사치일 뿐이어서 서둘러 집을 나선다.

차는 막히고 배는 아프고 출근시각은 다가오는데 나는 아직 도로 한가운데에 있다. 지각을 한다면 근무평가에 안좋을텐데. 다행히 10분전에 회사에 도착해서 지문인식을 하고 정상출근을 했다. 다들 반갑게 인사를 하지만 아침의 풍경은 무겁다. 십 년을 넘게 다녀도 회사는 적응하기 어려운 곳이다. 나 역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가끔씩은 출근하기 싫을 때가 있다. 하물며 적성에 맞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떨까. 무슨 마음으로 회사를 다닐까. 멀리 볼 것도 없이 하루를 어떻게 견디어 낼까?

라디오에서는 하루 종일 직장인들 힘내라고 응원가를 부른다. 청취율에 목숨을 거는 DJ들의 영혼 없는 주문은 직장인들의 현실에 닿지 못한다. 언제부터인가는 TV와 라디오에서 MC나 DJ들이 시청률과 청취율을 뼈가 담긴 웃음의 소재로 삼아서 노골적으로 이야기한다. 즐겁게 게스트들과 웃으면서 사연을 읽고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돌연 시청률과 청취율에 대한 얘기를 슬며시 꺼낼 때, 노동이라 여겨지지 않았던 그들 역시 한 명 한 명의 노동자임을 알게 되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있음을 자백받는 순간, 왠지 모르게 그들의 노동에 대한 환상이 배신으로 느껴지는 건 나 뿐일까.

그래서 그들의 청취율 타령은 서글픈 구석이 있다. 화려해 보이는 그들 역시 우리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시청률과 청취율에 목숨을 거는 것처럼 우리는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고3때 그렇게 울었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이 사색의 장소로서의 상징을 잃어버린 지 오래며 수험과 취직을 위한 대여 공간으로 변신한 것이 놀랍지 않다. 사색의 장소는 기능의 장소로 변모한 지 오래다.

이 시대에는 노동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할는지 모른다.

노동이라는 것은 귀천이 없는 신성한 의무이고,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누누이 말을 들어왔지만, 도대체 그 말은 누가 처음 얘기해서 우리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었는지 따져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요한 하위징아가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의 본성이 놀이하는 인간이라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일만 하는데 보낼 수 있을까. 나는 노동이 신성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근면이라는 것이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은 대부분이 아는 사실이지만 지금은 근대가 아니고 현대이다. 근대에는 산업의 발전을 위해서 ‘전근대적인’ 노동의 정의에 부합될 만큼 열심히 일할 필요가 있었다. 노력하는 만큼 대가가 손에 쥐어지는데 열심히 하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도 일리가 있는 시절이었고 오히려 어느 부분에선 지금보다 더 풍요로웠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산업이 성장기로 가는 시절이었으니, 앞만 보고 달려도 부족할 만큼 노동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당연했고 그런 줄 알았다.

지금 우리는 유례없이 발전(?)된 사회에 살고 있다. 정보량은 원하는 만큼 무한대로 접할 수가 있으며 알아야하고 알게 되는 것도 많아지게 되었다. 당연히도 노동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게 되었고 더이상은 근대와 같은 방식으로 일을 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와 대응하여 지배구조 역시 더욱더 세분화되어 ‘신성한 노동‘을 ‘관리’하기 시작했고, 이미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일상 깊숙이 침투해 있다.

그와 동시에 우리들은 똑똑한 바보가 되어가고 있다. 총명하고 명석한 사람들이 집단이라는 미신에 마비가 되면 바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자크 라캉이 일찌감치 통찰한 것과 같이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이 사회의 핵심 동력은 필요이다. 필요라는 단어를 생각해보기 위해서는 자유라는 말과 떼어 놓기 힘들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욕망이 우리의 자유의지로 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 역시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의지)은 아닌 것이다. 이 사회의 주요한 전략은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p. 17)

농부들은 자신들이 먹기 위해 수공업자들은 자신이 생산한 물건들을 만들어서 팔기 위해 노동을 했다. 산에서 나무를 해오고 지푸라기를 가져다가 밤새도록 꼬아서 짚신을 만들어 팔았다. 대장간에서는 각종 도구들을 만들었고 농부들은 밭에서 어부들은 바다에서 먹을 것을 구했다. 생산, 유통, 판매를 혼자 다한 셈이다. 당시의 노동은 고되지만 신성하다고 할 만한 것이었다. 노동에 대한 의식이 있었고 사명감이 있었다. 자신의 노동에 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고 ‘관리’했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없었다. 땅의 상태, 날씨, 계절의 변화, 바다의 조류, 계절에 따라 물고기들이 잡히는 시기 등등. 수많은 전문적인 지식을 알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들이었다.

장인들은 그러한 노동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누군가의 주머니를 채워주기 위한 혹은 비워내기 위한 노동이 아닌 것이다. 장인들은 노동에서 소외되지 않았다. 노동이 즐겁지는 않았으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소모되지 않았다. 하면 할수록 기품이 갖춰가는 장인의 노동이 ‘놀이하는 인간’에 가깝지 않을까. 반면 말할 것도 없이 현대 직장인들은 일을 하기싫다를 넘어서 자신이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불분명하다. 물론 이런 생각도 월급날이면 금방 잊혀지기는 하지만.

아이러니 하지만 조선시대 장인들의 노동과 지금 직장인들의 노동의 큰 차이는 자유이다. 당시 조선의 장인들은 나라의 부름을 받으면 그에 합당한 보수를 받든 받지 못하든 그만둔다는 자유가 없었지만 현재의 직장인들은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일을 하기 싫어하면서도 회사를 그만두는 것에 대한 불안을 느껴 표면적으로만 ’자발적인‘ 노동을 하고 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전문가들의 사회 혹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벗어날 수 없는 덫이다.(p. 31, 161, 4장)

기품이 사라진 노동은 즐겁기 힘들다.

아침부터 라디오 때문에 생각이 많았다. 어쨌든, 출근을 하자마자 커피를 탈 여유도 없이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창을 열었다.

Credit editor 글작가, 화가 윤원보

What do you think?

56 points
Upvote Downvote

Comments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Loading…

0

(전시) OWN CREATION / 08am,YOYOJIN,Stella Kim

Today Artist_전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