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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윤원보 vol.7 리뷰 (2부)

아프리카 africa, 2019, oil on canvas, 73x91cm

3. 

[속보] 넥스트 리더 신해철씨 위독, 혼수상태.

이게 무슨 일일까. 금방 털고 일어날 줄로만 알았던 그가, 이렇게 허무하게 가버리려 하다니. 이렇게 가버릴 거였다면 대학가요제 때 대상은 왜 받았고, 넥스트의 명반들은 뭐고, 고스트스테이션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위로해주던 말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어진 다른 얘기는 의료사료가 의심된다는 뉴스였다. 그 뒤로 고인을 둘러싼 유족과 강세훈씨의 법적 공방이 이어졌다. 의료사고가 맞다, 아니다. 나 역시 나름대로 찾아보면서 의료사고쪽으로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검찰과 국과수의 발표도 의료사고로 무게가 실리는 상황이었다. 의료사고에 대한 대한의료협회의 발표 결과만 남겨놓고 있었는데 사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어쩐 일인지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 왜 그럴까.

줄리안 반즈의 소설 제목처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발표내용은 ‘의료과실로 단정 짓기 어렵다’였다. 그럼 그렇지. 신해철은 우리 곁을 떠났고, 슬픈 유족은 남았으며 신해철을 집도한 의사는 여전히 의사 면허를 가지고 있다. 국회를 통과한 신해철법에 대해서 격렬히 반대하던 대한의사협회는 자신들이 의사라고 생각할까. 물론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만든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들, ‘의료전문가’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 철옹성을 쌓아서 일반사람들이 넘보는 것을 두려워한다. 자신의 기득권을 언어와 단어에 은폐해 놓고 우리들을 자신들의 영역으로부터 성공적으로 (지금은)유리시켜 놓았다.

예전에 대장내시경을 통해 용종 제거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 며칠 후에 출혈이 생겨서 다급하게 응급실을 갔는데. 의사, 레지던트들은 정확히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화장실을 다녀올수록 피는 더 나오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의사에게 말을 했더니 고개만 갸우뚱하고 이런저런 테스트를 했다. 당시 받았던 검사 내용으로는 항문으로 손가락 넣어서 검사, 심전도 검사, 피검사, 소변검사, 위세척(당시 주변에 있던 간호사들이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등, 이 모든 검사를 7~8시간을 기다리면서 받았다. 밤을 새고 결국 한다는 말이 대장내시경을 다시 한 번 하자는 것이었는데 밤새고 장청소 약을 먹고(먹어본 사람들은 안다) 비수면으로 대장내시경을 받았다. 결과는 용종을 떼어낸 자리에서 출혈이 생긴 것 같다는 소견이었다. 1박 3일 동안 응급실에 입원을 했고 뭔지 모를 링거와 약을 투여 받았다. 이 모든 과정은 나를 ‘환자’로 만들었다. 전문적인 의료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의료전문가들이 하는 말에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나의 사례와 신해철의 사례는 근본적으로 같다. 신해철 역시 의료전문가의 말을 따랐고 나 역시 의료전문가의 말을 따랐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신해철이 운이 없었던 것일까. 문제는 의료만능사회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의료에 대한 모든 관할권을 전문가들에게 넘겨주었는데 과연 그것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 그들에게 있느냐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p.23, 71)

(의료는 문제를 개인으로 국한시켜서 사태의 범위를 의도적이든 그렇지않든 은폐하려는 경향이 있다)
의료시스템은 병원을 넘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리의 일상 깊숙한 곳까지 개입하고 있다. 무엇을 먹을 것인지, 어떤 운동을 할 것인지 몇 시간 잠을 자야하는지 습관은 어때야하는지 등등 말이다. 미디어에서는 의사들이 출연을 하여 사람들의 고충에 대해서 솔루션을 제안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심지어 이혼에 대해서 의사나 변호사를 비롯한 각 분야 전문가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하는 말들에 무게가 실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느 프로그램에서는 한의학과 양학의 대결구도를 만들어 공방을 벌이는 포맷이 있었다. 서로에 대한 존중은 없고 비판만 있었다. 의학이라는 것이 전문적이고 과학적이라면 공방이 있을 이유가 없다. 임상적으로 어느 치료가 효과가 있는지 밝히면 될 일이지 한의학이 옳다 서양의학이 옳다, 거기서 서로 비판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한 연구마다 결과가 다르다는 것을 흔히 우리는 접할 수 있다. 커피를 하루에 몇 잔 이상을 마시면 좋다, 아니다, 술을 하루에 얼마나 마시면 좋다 안 좋다, 의학적 지식이 없는 우리는 사춘기 소녀의 마음과 같이 변덕스러운 연구결과에 어쩔줄 모를 뿐이다.

의료는 도덕적으로 중립성을 가진다고 믿어버리기에 어떠한 잣대를 들이대기도 쉽지 않다. 우리의 병을 고쳐주는데 당연히 좋은거 아닌가? 우리는 건강검진을 받는다.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예방이라는 명분하에 2년에 한번 정도 받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을까. 병을 예방하면 좋은거 아닐까. 그런데 만약 건강검진을 통해서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회사가 알게 되었다면 회사는 노동의 가치가 떨어진 우리를 보호해줄까 아니면 내쫒을까. 어쩌면 이것은 ‘비정상적인’ 신체를 골라내서 도려내는 하나의 검열 시스템으로도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비유가 극단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필라델피아’를 보라) 또한 비싼 의료기기는 누구의 돈으로 샀을까? 병원에서 최신 치료 기계를 샀을 때 홍보하는 이유가 뭔지는 다들 짐작할 것이다. 의료전문사회는 우리를 자발적인 환자로 만들어 놓았다. (p. 23, 86)

생각해볼 문제는, 과연 그것을 우리가 “필요”로 했느냐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노동과 의료 혹은 사법제도는 자본주의에 의하여 포섭되어왔다. 이 거대한 자본주의 치하에서는 누구도 예외 없이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자본주의의 목적은 우리가 필요로 생각지 않았던 것들을 ‘필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필요를 만들기 위해 전문가들은 자본에 복무한다. 광고만 봐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 없는 것들이 필요하다고 우리를 세뇌시키고 있다. (유명한 전문가들을 섭외한 광고를 보고도 지냥 지나치기에는 도대체 어렵다) 우리는 기품 없는 노동자 신분으로 인생을 판 대가로 받은 알량한 월급에 영혼을 빼앗기고 손님은 왕이라는 환상적인 기분을 느끼며 소비한다. 그리고 다시 노동자 신분으로 전락한다. (p. 31)

전문가들을 거부하자는 일차원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라는 조작된 ‘권위’가 만들어 놓은 ‘필요하지 않은 필요’를 우리에게 주입시켜려 할 때를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문가라는 허울에 속지 말아야 한다. 시스템의 단일화 된 기준 안에서 작동하는 자본, 학력으로 대표되는 전문가는 이제 점점 신화로 기억될 위치에 놓여있다. 시스템 균열의 징후는 여기저기서 목격담이 전해지고 전문가라는 신화의 절대적인 믿음의 누수는 이미 시작되고 있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암약’해오던 ‘아마추어’들의 등장이 네트워크라는 인류사적인 사건의 시대를 만나 촉발되었고, 이제 시스템 안에서 순항하던 전문가들의 예고된 좌초는 시대의 조류를 읽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자신들의 권위에 기댄 ‘아마추어적인’ 안목의 잘못에서 기인할 것이다.

아마추어라고 여겨졌던 ‘덕후’들의 등장은 전문가들의 위기감에 불을 지필 것이고, 그럴수록 전문가들은 더욱더 자신들만의 언어로 도피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지 못한’ 아마추어를 자신들의 경쟁 상대로 인정 할 수 없는 기득권의 모습은 결국 자화자찬으로 비춰질 것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다.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고 주변의 사랑이 필요하다. 집이 필요하고 옷이 필요하며 먹을 것들이 필요하다. 아플 때는 엄마 손이 약손이었고, 사람이 태어나고 죽을 때 결혼할 때 이웃들과 함께 의식을 치루고 애도하며 축하해주었다. 그 속에서 어른들의 지혜와 경험을 습득하였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지금은 그 자리를 전문가들이 대신하고 있다. 돈만 주면 회사가 산부인과가 장의사가 대신 해준다.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파편화시켜서 분리해놓고 사회적인 아기로 만들어 놓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자신이 ‘관여’하는 장인들의 삶과는 반대로 말이다. (p. 39, 42, 3장)

이제 다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에 대한 물음을 우리가 가져와야 한다. 물음을 정의하는 권력보다 더 큰 권력은 없다. (p.115) 그 물음이 우리의 것이 될 때, 전문가들이 해왔던 일들은 더이상 그전처럼 우리를 관리하지 못할 것이다. (p. 28)

4.

2014. 10. 27

다음날 신해철은 사망했다.

신해철을 집도한 강세훈 의료전문가는 기자들의 질문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라는 말만 남겼다. 그는 의사면허증이 유효한 상태이며 비만 관련 수술 및 처치를 하지 말라는 보건복지부의 명령에 반발해 법원에 집행정지 신청을 했으나 기각되었고, 지난한 재판 끝에 1년여의 실형이 확정 되어 의사면허가 취소되었다.

그 후 신해철법이 제정되었고, 신해철 거리도 만들어 졌지만, 그가 떠난 세상은 그의 빈자리만큼이나 가벼워졌고, 나 역시 이 세상에 대한 미련도 그만큼 사라졌다.

<전문가들의 사회 Disabling Professions>, 이반 일리치 외

Credit editor 글작가, 화가 윤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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