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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윤원보 vol.9 '무면허' (1부)

<당신이 오는 소리 >, oil on canvas, 117 x 91cm, 2021

1. 
love in December 
So this is love in the end of December
Quiet nights quiet stars
And I’m here Monday to Sunday
‘Cause you’re fragile and I’m weak

27살의 나는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일이 없는 프리랜서는 반백수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이 통용되는데, 그것은 마치 고등어(프리랜서)를 고등어(반백수)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 역시 고등어를 참돔이라고 우길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주변에서조차 그렇게 보는 것은 곤란하다. 해서, ‘취직 언제하냐’라는 말을 들을 때면 ‘나 참돔이거든’하고 노량진 수산시장 32호집 김낙자 할머니(82세, 수산업)보다 엄격하게 어종를 구분했다.
당시 회사원이던 누나는 다른 회사와 합사를 나가서 당분간 늦게 끝나곤 했는데, 백수인, 아니 프리랜서인 나는 별다른 할 일도 없어서 선릉역으로 누나를 마중나가기로 했다.

2. 선릉역
So you fall with the nights’ grow longer into sleep 
You won’t wake up 
And I am here I’m sitting beside you 
And I’ll wait until the spring

27살의 12월 늦은 밤, 아파트 현관을 나서니 밖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에서는 club8의 love in December가 흘러 나왔는데, 풍경과 음악의 우연한 마주침은 내게 비현실적인 감동으로 남아서 차 안에서 여자친구와 함께 맞이한 함박눈보다 그날의 기억이 더 선명하다(눈오는 날 여자친구와 싸워서 그런 거 아니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아직까지도 내 귓가에 자동으로 재생되곤 하는데 별일이 없는 한 club8은 평생 내 겨울용 음악 노예가 될 거다. 

선릉역으로 향하는 깊은 밤의 텅 빈 지하철은 현실감이 없었다. 프리랜서라는 묘한 신분으로 낮과 밤을 구별할 수 없는 공간에 앉아 있으니 내가 탄 지하철은 마치 나를 호그와트로 데려가는 것은 아닌가하는 몽상에 빠지게 만들었다. 대각선 맞은 편에서 꾸벅꾸벅 조는 행색이 초라해보이는 할아버지가 사실은 나를 호그와트로 데려오라는 (그러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덤블도어의 지령을 받은 해그리드는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는 사이, 목적지를 알리는 지하철의 안내방송은 나를 조앤 롤링의 판타지에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한 현실로 안내했다. 필립 말로는 해그리드를 뒤로 한 채 선릉역을 빠져나왔다. 여전히 눈이 내리는 거리를 걷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앞서 걷고 있는 때를 모르는 트렌치코트의 사내는 이슥한 밤의 동지로 느껴져 왠지모를 안도감을 주었다.
누나 회사 부근에 도착하여 눈에 보이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컵라면을 하나 사들고 면이 익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 눈에 봐도 연예인 같은 언니들이 들어왔다. 살짝 위축이 된 나는 점원을 보았는데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바코드를 찍고 있었다. 그리곤 깨달았다, 아, 이 언니들 프로시구나. 눈이 내리는 유리창에 비친 아마추어인 나와 프로 언니들이 나란히 서서 라면을 먹는 모습을 보니 앞서 말한 club5의 love in September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프로 언니들의 향수냄새가 짙게 밴 라면을 먹고도 할 일이 없어서, 나는 어둑한 지하 PC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3. 구원
Don’t you worry I’ll be there for you
Don’t worry about me
You know me better than that
Don’t you worry I will be there for you
I’ll catch you if you would fall

미대입시의 꿈을 이루지 못한 나는 현직 작가에게 그림을 배웠다. 기초적인 뎃생부터 시작해서 수채화, 점묘화, 아크릴 등의 기법을 대부분 배웠다. 나를 가르쳐준 누나는 나에게 너는 꼭 그림을 그려야한다고도 했다. 나 역시 아, 나는 이렇게 쭉 그림을 그리면서 순탄하게 살겠구나, 생각했다. 착오였다. 그림을 배우고 일을 할수록 허전함을 느꼈다. 누나의 스타일은 내가 지향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나는 눈물을 떨구면서 누나에게 겨우 말했다.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은 다른 그림이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부족한 나를 가르치는 동안 누나도 생각이 많았을 거라는 것을 당시에는 잘 몰랐다. 허전함을 느낀 또 다른 이유는 미술 이론에 대한 욕구였다. 전공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나를 자극해서 일부러 어려운 책들을 읽게 만들었다. 실제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내가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 나의 밑빠진 항아리를 채워 줄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럴수록 비전공자의 자격지심은 더 깊어만 갔다. 마치 추리닝을 입은 자존심같다고나 할까. 나는 나만의 스타일을 찾고자 혼자 집에서 그림을 그렸다. 무엇을 그릴 것인지도 모른채 그냥 그렸다. 그리다보니 지금 내 메인 캐릭터 토끼인 핍의 원형이 그때 만들어졌다(아직 가지고 있다). 내내 토끼를 그리면서 생각했다.

“네가 나를 구원 할 수 있을까”

1부 끝.

Credit editor 글작가, 화가 윤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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